청도에 간 후 얼마 안 되어 만호는 곧장 일자리를 얻었다. 워낙
에 중국집 주방 일은 손에 익은 터라, 어디에 가든 일자리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청도보건소 앞에 있는 보건반점이었다. 그곳은 시골의 작은 중
국집이라 만호 혼자서 주방의 모든 일을 처리해야 했다. 사람이
없어 몸은 힘들었지만, 이 사람 저 사람 눈치 보지 않고 만호가 해
보고 싶은 것은 다 할 수 있어서 좋았다.
평일에는 손님이 별로 없어 남은 재료를 이용해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장날이 되면 하루 종일 눈코 뜰 새 없
이 바빠서 오후 3시가 되어서야 간신히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더욱이 장날이면 중국집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래서 사장님
이 하루 일당을 주고 심부름 할 사람 한명을 붙여 주기도 했다.
워낙에 만호가 손이 빠르기 때문에 한 사람만 더 있어도 매상은
쑥쑥 올랐다.
일찍 일을 마치는 날이면 큰누나 집에 놀러가 쉬기도 했다. 가끔
아버지가 청도로 찾아오셨다. 말씀은 어떻게 지내나 궁굼해서였
다고 하지만 대부분 생활비를 타 가기 위해서였다.
보리타작 철이면 중국집 일은 적어지고 농촌 일이 더 많아져서
이웃의 논이나 밭으로 나가 일을 거들기도 했다. 파리나 날리는
주방에서 멍하니 있는 것보다 바쁘게 몸을 쓰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해서였다.
보리타작을 한 날이면 몸을 움직이기 어려울 정도로 피곤했지만
만호는 적당한 피곤을 즐기듯이 쉴 틈 없이 일하고 또 일했다.
만호가 그렇게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고 일을 하면 사장님이 뜯
어 말리곤 했다.
"좀 쉬어가며 해라. 우째 그리 일을 만들어서 하노!"
"사장님예, 괜찮습니더."
"만호 주방장은 연애도 안 하나? 여자도 좀 만나고, 영화도 보러
가고, 우째 그리 순진하노?"
쉬는 날에는 주방에 나와 요리책을 보며 이러저런 재료들을 만
지고 있는 만호를 볼 때마다 사장님이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마디 했다. 그럴 때마다 만호는 그저 씨익 웃을 뿐이었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드디어 봄이 찾아왔다. 아지랑이 피어오르
고 노랗고 빨간 꽃들이 들판을 수놓았다. 만호는 오랜만에 뒷산까
지 달려 올라가 기지개를 켰다.
콧속으로 봄바람이 불어왔다. 만호는 한껏 숨을 들이마신 후 넓
은 들판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른 하늘이 온통 만호의
가슴 위에 펼쳐진 것처럼 푸러렀다. 만호는 코끝을 간질이는 바람
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예전에 영은이와 함께 나누었던 그 바람 냄새가 어느새 다시 느
껴졌다. 그러고 보니 문득 영은이가 그리워지기도 했다.
'미국에서 잘 있나 모르겠네. 편지한다 카고 하지도 않고...'
들판에 누워 하늘을 보던 만호가 피식 웃으며 일어났다. 한가하
니 별 생각을 다 한다 싶으면서도 그 시원한 봄바람이 싫지가 않
았다. 만호는 곁에 핀 진달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
상했다. 선명한 분홍빛의 진달래가 자꾸만 흐릿하게 보이는 것이
었다.
만호는 눈을 비비고 다시 진달래를 보았다. 진달래 주변으로 뿌
연 것이 올라오며 아지랑이 같은 가는 실이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시야를 가로 막았다. 눈을 비비고 나서 다시 똑바로 쳐다보려 애
썼지만 한 번 눈에 생긴 아지랑이는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너무 피곤했는가 보네. 한동안 뿌연 것이 흐릿하게 보이는 걸
보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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