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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호의 세상사는 이야기 뵈는게 없으면 겁나는게 없다

가족의 손길이 묻은 집은 추억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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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만호 작성일09-05-20 14:35 조회1,73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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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공사장 일이나 경비 일을 하면서 홀로 육남매를 키워야 했다. 아버지와 우리 형제들 모두에게 고생스러운 날들이었다. 더군다나 우리가 살고 있던 집이 도시계획 정리구역으로 들어가 철거되어야 했다. 시에서 하는 일이었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이 도로가 되어야 한다는 건 기막힌 일이었다. 하는 수 없이 은행나무 있는 데로 옮겨 다시 집을 짓기로 했다. 우리 가족들은 벽돌이나 필요한 물건들을 일일이 직접 옮기고 쌓아올렸다. 작고 초라한 집이었지만 우리 모두의 손으로 지은 집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집에서 오래 살 수 없었다.

 

  도시계획으로 인해 우리 집 말고도 또 한 집이 지어졌는데 그 집 주인은 도시계획 감독관이었고 아버지하고는 형님동생으로 지낼 만큼 친한 사이였다. 그 사람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 새로 지은 집이 멋있었지만 우리는 돈이 없다보니 슬레이트집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우리 집을 자기 집과 한 필지로 등기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 우리는 살림도 어려웠고 살아가는 게 힘들다보니 빨리 등기를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의도적으로 자기 집과 함께 등기를 해버린 것이었다. 기가 막혔다. 아버지는 자주 그 사람에게 가서 우리한테 등기를 돌려달라고 했지만 시간만 흘러갈 뿐이었다. 정말 나쁜 사람이었는지, 사는 게 힘들었던 것인지, 그 사람이 담보로 집을 잡히고 사채 돈까지 빌려 썼다고 했다. 그것이 집을 영영 뺏기게 된 동기였다.

 

  어쨌든 집을 날린 그 아저씨는 속병이 났는지 얼마 되지 않아 병으로 돌아가셨다. 사채업자들이 몰려와 빚 대신 집을 내놓으라고 매일매일 소동을 부렸다. 그 집 식구들은 집을 비워주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 그러나 우리는 당장 다른 곳으로 이사할 여력이 없었다. 하루하루 봐달라고 부탁하면서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법에 호소하였다. 이렇게 되기까지 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내가 고생고생하며 중국집을 하면서 마련한 돈으로 변호사를 선임하여 재판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나 법은 우리를 지켜주지 못했다. 억울한 사정은 구제받지 못했고 결국에는 패소하여 강제 철거에 들어갔다. 우리가족은 말 그대로 길바닥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뒤에서 이야기 하겠지만 형은 갑자기 세상을 뜨고 집도 없이 나이 많은 아버지와 어린 조카, 형수와 함께 앞으로 살아갈 일이 큰일이었다. 집주인은 아버지에게 약간의 이주비용만을 주었다. 부족한 돈을 힘들게 구해서 낯선 보금자리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식구들이 정들게 살아온 집을 가슴에 묻고 윗동네로 이사를 하였고 그 집에서 얼마 살다가 다대포로 옮겨 정착하게 되었다.

어머니의 손길 닿은 집도 아버지와 형님, 형수, 조카와 동생 그리고 우리 가족의 땀과 손길 묻은 집도 이젠 추억 속에만 남았다. 한 번쯤 먼 발길에서나마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었다. 정말 많은 시간이 지나도 오랫동안 그 억울함과 설움은 잊히질 않았다. 가족들이 살던 집도 지켜내지 못한 장남으로서 역할을 못 다한 것에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았다. 앞으로 꼭 되찾는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살아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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