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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호의 세상사는 이야기 뵈는게 없으면 겁나는게 없다

가장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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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만호 작성일09-05-20 14:17 조회1,61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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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의 장례를 치른 뒤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일을 시작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버지, 형수, 조카 4 명과 동생 나까지 아홉 명이 살아갈 일이 막막했다. 다니던 식당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기존의 수입으로는 많은 식구와 함께 살아가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다른 일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객지 생활을 접고 아버지와 형님 식구들을 곁에서 돌봐야 할 시점이었다.

 

  중국집에서 일할 때 단무지를 배달해주던 아저씨가 생각났다. 식당으로 수금을 하러 오는 저녁 시간에 맞춰 아저씨를 만나러 갔다. 내 사정을 얘기하고 하루 수입이 얼만지, 물건은 어디서 구입하는지 알아보았다. 단무지 공장은 충무동에 있었다. 운이 좋았는지 내가 사는 사하구에는 중국집에 단무지 배달하는 사람이 없었다. 접시저울. 플라스틱 큰 통, 봉투, 자전거 등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여 바로 배달을 시작했다. 그 당시 중국집이 많지는 않았지만 하단동, 장림동, 신평까지 날이 갈수록 단골이 늘었다.

 

  노는 날 없이 비가 오든 태풍이 오든 제시간에 배달을 하였다. 어떤 날은 중국집에서 장사가 안 되어 물건을 받지 않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은 물건을 못 팔고 와야 했다. 신평에는 높은 고개가 있었는데 물건을 다 팔고 온다는 생각에 고개를 오르면서도 기운이 났지만 못 팔고 올 때면 자전거에 실린 짐이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었다. 오르막이라 자전거를 탈 수 없고 걸어서 밀고 고개를 넘어가야 한다. 무거운 것을 싣고 다니다 보니 자전거도 6개월만 지나면 새로 사야 했다.

 

  나도 힘이 들었지만 아버지와 형수도 어린 조카들을 돌보느라 힘든 시절이었다. 의견이 맞지 않아 다투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래도 우리 가족은 위로하고 격려하며 서로의 힘이 되었다. 나는 먹는 것을 담당하였고 아버지는 생활비를 담당하였다. 형수도 집 앞에서 노점상을 하면서 나름대로 가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나는 집에 돌아올 때 먹을 것도 사가지고 오기도 했는데 아버지 것만 살 수 없어서 식구들이 다 먹을 만큼 많이 사야 했다. 우리는 하나의 가족이었다. 어떤 날은 아버지와 형수와 조카들을 데리고 용두산공원으로 나가거나 충무동에 가서 가끔 영화를 보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내가 조카들의 아버지 역할을 할 수는 없었다. 조카들의 덕을 보자는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 없이 자라는 조카들이 마음 아팠고 그렇게 하는 것이 형에 대한 내 도리라고 생각했다. 삼촌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충실하게 가장 역할을 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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