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 주방장은 미혼이었는데 그 집에서 장가를 보내 주었다. 결혼 후 주방장은 처가인 전남 강진에서 독립을 할 예정이었다. 그는 개업을 하게 되면 강진에 와서 자신의 일을 도와달고 내게 부탁했다. 나는 그가 연락을 하면 달려가겠다고 약속을 하고 주방장이 떠난 자리를 대신 했다. 용호동의 가게엔 손님이 많았다. 나환자촌 농장 안에서는 원래 술은 팔지 못하게 되었으나 지배인은 요리를 주문받으면서 술도 함께 배달시켰다. 농장에는 평일에도 사람들이 많았다. 오륙도를 구경하려고 마을버스를 타고 오는 사람들과 피부병 잘 보기로 소문이 난 의사를 보러 오는 환자들이 많았다. 나는 오후에 해녀들이 갓 잡아온 문어나 조개류들을 사와서 가끔 새로운 반찬을 내놓기도 했다.
나환자촌이다 보니 가게 바로 옆에도 나환자가 살고 있었다. 어쩌다 집 밖에 나와 있는 그를 보곤 했는데 사람을 만나 반가운지 가끔 그가 음식을 건네주곤 했다.?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놀라 도망갔다. 나환자가 몽땅한 손으로 송편을 집어주니 다들 기겁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나병은 상처로 전염이 되는 것이지 음식으로는 전염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허물없이 대하는 나를 그는 늘 반겨주었다. 정이 많이 든 곳이지만 그곳도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강진에서 개업을 한다며 연락이 온 것이다. 주인한테 그만둔다고 말하고 강진으로 떠났다.
강진에서 10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마을이 있었다. 막상 가보니 장사하기가 쉽지 않은 곳이었다. 게다가 개업을 한 것도 아니었고 주방장은 영락없이 처가살이하는 머슴 신세였다. 산에 가서 나무도 해 와야 했고 잡일도 하였는데 나 역시 놀고먹을 수는 없어서 그와 함께 나무를 하거나 잡일을 거들었다. 잠도 그의 신혼 방에서 함께 자야 했는데 밤마다 곤혹을 치러야 했다. 사는 게 말이 아니었는데 그의 형편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왜 나를 불렀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농촌에 식량이 넉넉하지도 않은데 백수 사위를 따라와 있는 나까지 처가 사람들의 눈치가 보였다. 나는 밥값을 하려고 집안일을 거들었고 동네사람들을 따라 갯벌에 바지락을 캐러 다니기도 했다. 그물처럼 생긴 채에 뻘을 담아서 물에 넣어 흔들면 바지락만 남았다. 힘은 들었지만 그래도 멀쩡한 직장 그만두고 왔으니 개업을 도와 새 일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지루한 시간을 기다렸다.
하루는 주방장과 내가 산에 나무를 하러 갔는데 좀 멀리 나갔다. 나무가 많아서 빨리 한 지게를 했는데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그때 한 스님이 따라오라고 해서 절까지 나무를 지고 내려갔다. 알고 보니 그 산은 절에 속한 것이어서 일반 사람들은 나무를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우리는 몰랐다며 죄송하다고 사과를 드렸다. 그런데 스님께서 제안을 하셨다. 부처님께 절을 하면 나무를 가져가게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이게 웬 떡인가 싶어서 그러자고 했다. 주방장과 나는 스님이 목탁을 한 번 칠 때마다 부처님께 절을 했다. 그런데 스님의 목탁소리가 끝나지 않는 것이었다. 머리를 조아리며 엎드릴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이겠지 하였지만 스님의 목탁소리는 계속되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수십 차례 절을 드려야 했다. 그렇게 스님은 우리에게 부처님과의 인연을 맺어주시려 했던 것 같았다. 평소 안하던 절을 하고 나무 한 짐 지고 산을 내려오는데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그 다음부터는 절대로 그쪽 산으로는 나무를 하러 가지 않았다.
천신만고 끝에 중국집 개업을 하게 되었는데 일하는 사람은 나 혼자이다 보니 주방일은 물론이고 홀을 보는 일, 담배 파는 일, 배달까지 모두 해야 했다. 부산에서 함께 일한 정 때문에 좀 도와주러 온 것이 완전 머슴이나 다름없었다. 부산에 그냥 있었으면 주방장이었을 나를 데려와서 이렇게 부리니 서운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지만 이왕 도와주러 온 것인데 기반 잡을 때까지 있자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돈이 자꾸 모자란다는 것이었다. 담배도 팔고 음식 값도 받고 배달도 하다보면 헷갈릴 수도 있겠다 싶었을 뿐 설마 나를 의심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내게 도둑 누명을 씌워 내 옷과 가방을 마구 뒤졌다. 그리고 내가 부산에서 갈 때 비상금으로 가져간 돈을 자신에게서 훔친 돈이라며 다 빼앗았다. 자신의 일을 도와주러 간 사람에게 도둑으로 몰아 타지에서 알거지로 만들다니 기가 막히고 괘씸했다. 아무리 내가 바보라도 도둑 누명을 쓰고 있을 수는 없었다. 짐을 챙겨서 그곳을 떠났다. 그동안 일한 보상은커녕 주머니에는 차비로 쓸 돈도 부족했다. 버스를 타고 영산포의 역으로 갔다. 밤 열차는 있었으나 차비가 부족했다. 고픈 배는 물로 채울 수 있었지만 부족한 차비는 마련할 길이 없었다.
어떻게라도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역 앞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면서 도움을 청했다. 다행히 인심이 사납지 않던 시절이어서인지 몇몇 분들이 도움을 주었다. 겨우 구포까지 갈 수 있는 표를 구하고 열차에 몸을 실었다. 돌이켜 생각하니 서럽기도 하고 억울했지만 더 급한 것은 배고픔이었다. 가족들 생각도 났다. 많은 생각 속에서도 선잠을 자면서 아침에 구포역에 내렸다.
그 이후로 당연히 그 주방장과는 연락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대체 내게 왜 그랬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영산포역에서 내가 부산까지 올 수 있도록 차비를 주신 분들에게 이 지면을 빌어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전하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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