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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호의 세상사는 이야기 뵈는게 없으면 겁나는게 없다

(연재)바람을 헤치고 세상속으로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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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만호 작성일09-05-20 14:40 조회1,75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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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부산 사하구 괴정1 동, 성당 앞 작은 판잣집에서 아버지 조월근과 어머니 한순자의 축복과 사랑을 받으면서 6 남매 중 넷째로 세상에 태어났다. 지금 괴정동은 어느 지역보다도 많은 발전을 이루었지만 내가 어릴 때에는 그야말로 빈촌이었다. 본토 사람들도 있었으나 신촌 시장 주위에는 거의 다 피난민들이었다. 모두들 하루하루 어렵게 살아가고 있을 시기였다.

 

 그 당시 살아가는 것이 다 어려웠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머니께서는 감천 고개에 있는 밭에서 오이, 호박, 고추 등 여러 채소들을 떼어가지고 점심때쯤 버스를 타고 부평동 사거리시장에서 행상을 하셨다. 하루 종일 길거리에서 장사를 한 어머니는 어둠이 내리고도 한참 지난 시간이 되어서야 돌아오셨다. 누나와 형; 동생들과 나는 어머니가 빈 광주리를 들고 괴정 삼거리 버스정류소에 내리길 매일매일 기다렸다. 버스에서 내리는 어머니를 보고 형제들이 우르르 달려가는 그 순간이 어머니와 우리 모두에게는 하루 중 최고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어머니는 그런 어린 자식들에게 뭐라도 먹일 욕심으로 채소 판 얼마 되지 않는 돈을 축내어 간식거리를 사오곤 하셨다. 어쩌면 아직 어렸던 우리 형제들은 온종일 일이 고된 어머니를 반겼다기보다는 어머니 손에 들린 주전부리 거리에 더 신이 났을 것이다.

 

 아침에는 늘 야단이었다. 아직 어린 여동생과 남동생이 장사하러 가는 어머니를 놓아주지 않고 밭에 따라간다고 울고 떼를 쓰면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형님과 누나들에게 동생들을 잘 보라며 젖먹이들을 억지로 떼어내고 무거운 발길을 재촉하셨다. 여섯 남매를 먹어 살려야 했으니 하루도 쉴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는 가정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할머니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서 고무공장 일을 했다. 그곳에서 어머니를 만나 결혼하였다. 그 뒤 얼마 되지 않아 해방되자 할머니와 큰아버지와 함께 우리나라로 오게 되었다.

 

 할머니와 큰아버지는 고향인 창녕에 가서 살았고 아버지는 일본에서 일해 모은 돈으로 장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함께 동업하던 사람이 탕진하여 빈털터리가 되어 괴정동으로 와서 살게 된 것이었다.

외가댁은 그냥 일본에 남아 있었다. 그러다보니 웬만큼 잘 살았던 모양이었다. 일본에 가면 한 밑천 가져올 수 있을 거라며 아버지는 틈만 있으면 밀항선을 타고는 했다. 그러다 적발되어 일본 수용소에서 지내다가 처가 사람 만나고 약간의 돈을 받아 부산 수용소로 송환되었다. 그러다 일정한 시일이 지나면 석방되었지만 아버지는 기회 있을 때마다 밀항선을 탔다. 그러나 한 번도 성공한 적은 없었다. 아버지가 가장으로서 하는 일은 오직 한밑천 잡아보겠다는 헛된 꿈을 꾸는 것뿐이었다. 육남매를 혼자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우리 집은 괴정천 바로 옆이었는데 비가 많이 오면 물이 넘쳤다. 그래서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자다가도 대피하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었다. 밤새 비가 내린 다음날 아침이면 흙탕물이 우리 집을 집어삼킬 듯이 거칠게 몰아치면서 흘러갔다. 거센 물살에 휩쓸린 판잣집들도 떠내려갔다. 온갖 살림살이들이 매정한 물살을 따라 휩쓸려 떠내려갔다. 가축을 키우는 집들도 많았는데 어느 날은 오리들과 소도 떠밀려 내려갔다. 철없던 우리 형제들은 신이 나서 그 모습을 구경했다. 무서운 장마가 끝나면 온 집안에 흙탕물이 가득했다. 고된 일은 그때부터였다. 식구들이 물을 퍼내고 집안청소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개구쟁이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겐 즐거운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날이 개이고 며칠 지나면 괴정천의 물이 많이 줄어드는데 이때는 온 동네 아이들이 소쿠리나 그물 같은 것을 가져와서 메기나 붕어를 잡는다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잡은 고기는 며칠 모아 두었다가 많아지면 한꺼번에 매운탕을 해먹곤 했는데 그 맛이 기가 막히게 좋았다.

봄에는 보리를 꺾어 와서 불에 구워먹었고 여름에는 논물에 낚시를 던져 개구리를 잡아서 구워먹기도 했다. 지금은 신평 지역이 많이 발전되었지만 어릴 때만 해도 난립지였다. 바다와 민물이 합세하는 지역이라 물이 빠지면 갯벌에서 재첩이나 게를 잡곤 하였다. 당시에는 재첩은 얼마든지 잡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욕심을 내어서 한 자루씩 담아오지만 신평에서 집까지 메고 있던 자루가 무거우니까 재첩을 버리면서 와야 했다. 그러다 보니 집에 와서 쏟아 보면 채 반 자루도 못되었다. 여름에는 감천고개에 있는 바다에 갔는데 우리 모두의 해수욕장이었다. 지금은 매립하여 자동차도로로 사용하고 있으나 그 당시 여름 한철은 그곳 바닷가에서 보내면서 살았다.


 그 당시 자주 먹은 음식으로는 국수가 있었는데 지금의 국수처럼 끓여 먹는 것이 아니고 창포물에 국수를 잘게 부셔서 익혀먹는 것이었다. 수제비나 고구마, 감자를 삶아서 배고픔을 해결하였고 꽁보리밥도 많이 주기만 하면 마냥 즐거워했다. 정말 쌀밥 한번 먹는 게 절실하였으나 생일날 이외에는 쌀밥 먹는 것은 아주 어려웠다. 이제 와 생각하니 그 당시 텃밭에서 키운 풋고추와 상추 등 여러 채소들과 함께 먹은 꽁보리밥이 건강식이었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때는 그것밖엔 먹을 것이 없었다. 그에 비하면 현대는 그야말로 음식이 홍수를 이루고 있는 시대다. 우리 것도 부족하여 외국에서 다양한 음식들을 수입하여 먹으니 음식 천국이라도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내가 지압을 하다 보니 현대인들에게 많이 오는 비만, 당뇨, 고지혈증 등 각종 성인병은 너무 많이 먹어서 오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건강한 생활을 원한다면 가능한 절식을 해야 한다. 먹을 것 다 먹고 하고 싶은 걸 다 하면 건강할 수 없다. 풍부한 물자와 음식으로 둘러싸인 풍족한 시대일수록 가능하면 생활 속에 ‘절’자를 붙여 절주, 절연, 절식을 하는 것이 좋겠다.


 TV가 없던 그 시절에는 다방구, 굴렁쇠, 구슬치기, 사방치기, 고무줄넘기 등이 아이들의 최고의 놀이문화였다. 모두 밖에서 뛰어노는 것들이다. 지금 젊은 사람들에겐 생소하고 신기할 것이다. 요즘 우리 아이들은 인성교육보다는 성적 위주의 교육을 하고 있다. 다들 우리 아이가 남들보다 앞서야 한다며 밤과 낮, 평일과 주말 할 것 없이 혹사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게 온종일 의자에 앉아 생활을 지속하다보니 골 근육계 질환이 끊임없이 발생된다. 영양과잉으로 인한 비만, 나쁜 자세, 운동부족으로 인한 척추질환 즉 전만, 후만, 측만 등 여러 가지 불편한 상태로 우리 어린이들이 힘들어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인간도 휴식을 해야 하지만 근육과 골격도 쉬어야 한다. 내가 어릴 때는 밖에서 신나게 뛰어놀고 흙에서 뒹굴다가 엄마가 저녁 먹으라고 부르는 소리에 달려와 씻고 나서 꽁보리밥을 먹을 때는 꿀맛이었다. 가족들과 이야기하기도 하고 숙제와 공부를 하고 일찍 잠드는 것이 하루 일과였다. 그러니 비만이 있을 수 없고 척추 질환이 발생할 리가 없었다. 뿌리 튼튼한 나무가 큰 재목으로 자라듯이 우리 아이들도 너무 성적 위주보다는 먼저 인성과 건강을 생각하는 교육을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1960~1970 년대 음식으로 먹을 수만 있다면 각종 질환이나 성인병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어렸을 때 나는 몹시 개구쟁이였던 모양이다. 한 번은 형님 따라 놀러갔다가 발이 미끄러져서 내가 그만 높은 바위 밑으로 떨어졌다. 정신을 잃었는데 나중에 정신이 들었을 때는 괴정에 있는 한 병원이었다. 바위 위로 곤두박질 쳤으면 죽었을 텐데 다행스럽게도 바위에 붙어있던 조개더미를 스치고 떨어지는 바람에 엉덩이만 약 10센티미터 정도 찢어졌다고 했다.

 

 또 한 번은 어릴 때 성당 앞에 다리가 있었는데 다리 위에 앉아서 놀다가 다리 밑으로 떨어졌다. 아버지가 먼발치에서 내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뛰어오면서, '다리가 상당히 높으니 필시 죽었겠구나' 하고 앞이 캄캄했다고 하셨다. 그런데 운이 좋게도 내가 두 개의 큰 바위 틈 사이에 떨어지는 바람에 살았다고 했다.

초등학교 다닐 때 나는 고환에 참을 수 없을 정도의 통증이 있었다. 그 이후로 한쪽 고환이 계속 커지는 것이었다. 통증이 지속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이따금씩 통증이 오는데 노는 것도 쉽지 않았다. 원인도 알 수 없었고 생활이 어렵다보니 치료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적십자사에서 우리 집 생활이 어려운 것을 알고 수술과 치료를 무료로 해주었다. 수술하던 날 침대에 누워 올려다보니 천장에는 밝은 불이 여러 개가 있었고 몇 사람이 마스크를 하고 옆에 있던 것으로 생각난다. 수술은 잘 되었고 그 뒤로는 물론이고 현재까지도 별 이상 없이 살아가고 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에게 몹시 걱정을 끼치며 성장했다. 없는 살림에 부모님 속만 썩이며 어린 시절을 보낸 것 같다. 그 당시 어머니는 우리 육남매를 키우느라 고생만 하시다가 병을 얻었고 회복하지 못한 채 투병 생활을 계속하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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