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점 문방구를 할 때 현재 복지협회 사무장인 김광호 씨가 이웃에 살았다. 그는 내게 노점상 하는 것도 좋지만 구포복지관에서 재활 교육을 받으면 또 다른 세상이 열릴 거라고 권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반응도 하지 못했다. 교육을 받는다고 앞이 보이게 되는 것도 아닌데 굳이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 속에 섞이고 싶지 않았다.
얼마 후 재활 교육을 권하는 복지관 김장민 부장의 전화가 왔다. 나는 또 거절했다. 현재 이대로가 좋고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나는 스스로를 맹인으로 인정하지 못했다. 또한 겨우 적응한 익숙한 환경을 바꾸는 것도 선뜻 내키지 않았다. 이동문구점을 해서 먹고 살 수만 있다면 난 그대로 살고 싶었다.
노점문구장사의 수입이 차츰 줄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일반 문구점과 경쟁에서 밀리기 때문이었다. 또한 웬만한 교재는 초등학교에서 단체로 구비되어 나눠주기도 하였다. 학생들이 따로 사가야 할 준비물이 별로 없으니 장사가 예전 같지 않았다.
여러 가지로 생각이 복잡해졌다. 재활 교육을 받고 안마나 지압을 배우면 현재보다 살아가는 형편이 나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냥 아무런 변화를 겪고 싶지 않았다. 그건 내 자신을 시각장애인으로 나 스스로가 인정하는 일이었다. 바보 같은 소리지만 나를 시각장애인으로 인정하는 것은 죽기보다도 싫었다. 고집을 부리며 2 년 정도 버티었으나 도저히 노점 문방구로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 해야 한다고 늘 말해왔는데 나이만 자꾸 먹고 생활수준은 크게 변화가 없었다. 물론 나는 가장으로서 최선을 다하여 살아왔지만 세끼 밥 먹는 것만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볼 수는 없었다. 가족들을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도 내가 할 일이었다. 돈 버는 일이라면 사기치고 도둑질 빼고는 흉이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서서히 내 마음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교육을 받으려면 6개월 동안의 재활 교육과 2 년 동안의 안마수련협회 교육을 받아야 했다. 3 년이라는 긴 준비기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때까지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였다. 나는 아내와 의논을 했다. 아내는 나의 재활 교육에 적극 찬성하며 아이들이 등교하는 아침 장사가 매상의 절반을 넘으니 그때만 같이 하고 내가 교육에 들어가는 시간부터는 자신이 혼자 해내겠다고 했다. 아내에게 더욱 미안했지만 그럴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기간 동안 열심히 노력해서 아내의 고생을 하루라도 줄여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시각장애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거부하던 나는 어느덧 진짜 시각장애인의 삶을 인정하고 있었다. 나도 나이가 들고 아이들도 커 가는데 비전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보면 결국은 아이들 뒷바라지도 못하고 부모가 되어서 자식에게 큰 짐이 될 것이 분명했다.
이제 안정된 직업을 갖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재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내 스스로를 설득했다. 지압원을 하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 일하는 건 어떤지, 손님은 많은지, 먹고 살 만한지 여러 가지 정보를 미리 알아보았다. 이것저것 따져보니 아무리 생각해도 노점상 하는 것보다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 되려면 3 년의 준비기간이 필요했지만 그 길고 힘든 시간만 이겨내면 살아가는 형편이 지금보다는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생겼다. 그렇게 해서 복지관에 입학하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