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게 때문에 큰아이와 함께 할 수 없는 나와 아내를 대신해서 형님 딸인 조카가 서울에 가서 아이를 돌봐주었다. 수술하기로 한 날 아침부터 초조하고 걱정이 되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오후가 되어서야 연락이 왔다. 다행히 수술은 잘 되었다고 했다. 장골 뼈를 잘라내어 팔목에 이식을 했는데 어느 정도 붙으면 원 뼈가 자랄 수 있도록 수술을 한 번 더 해야 한다고 했다.
아이가 퇴원하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그래도 수술이 잘 되었다고 하니 일단 안심이 되었지만 어린것이 부모를 떠나 수술을 했으니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을까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다.
아이는 보름 만에 퇴원해서 돌아왔다. 아이의 팔이 연 날리는 얼레처럼 생긴 장치 속에 고정되어 있었다. 하루에 한 번씩 나사 같은 것을 돌려주면 아주 조금씩 돌리다 손목의 각도가 펴지는 거라고 했다. 어느 정도 뼈가 자리를 잡자 서울로 가서 재수술을 받았다. 양쪽 팔의 길이는 비슷했으나 한동안은 오래 쓰지 않아 많이 약해져 있었다. 혹시라도 잘못되면 어쩌나 오랫동안 마음을 졸였다.
지금 큰아이는 녹산에 있는 삼성전기에 다니고 있다. 다행히도 아이의 팔은 수술한 흉터 말고는 모든 것이 정상이다. 그 당시 팔이 정상으로 돌아온 것을 확인했을 때 나는 내가 눈을 뜨는 것보다 더 좋아했다. 내 잘못으로 아이가 장애를 가지고 평생 살아갈 뻔했다고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육 개월이라는 긴 시간의 치료가 끝나자 우리 가정은 다시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온 가족이 모두 건강하다는 것이 그렇게 감사한 일인 줄 그때 다시 깨달았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이었지만 그 무엇보다 우리 가정이 소중했다. 나는 날이 새면 또 다시 리어카를 끌고 이동문방구 장사를 시작했다. 리어카가 우리 가정의 울타리인 셈이었다. 아이들은 내 리어카를 똥차라고 불렀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희망의 리어카였다. 그 누구도 허름한 리어카가 우리 가정에 사랑과 행복과 미래의 꿈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알 길이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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