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장인장모님께 항상 고마운 마음과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딸내미 데리고 갈 때 고생 안 시키고 잘 살겠다고 했는데 잘 살기는커녕 노점상을 시키고 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남의 집 외동딸을 데리고 와 못 사는 것은 고사하고 나 자신 장애인이 되어 있으니 사는 게 기가 막힐 정도였다. 하지만 비록 장애가 되어서도 열심히 사는 모습으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어 더 열심히 살아왔다.
처가는 농사를 짓고 사는데 잘 살지도 않았으나 그냥 저냥 먹고 살 만은 했다. 그나마 먹을 양식은 처갓집에서 보내주었다. 내가 살 수 있는 데까지 살다가 정 형편이 안 되면 도움을 부탁하자. 그렇지 않고는 절대 도움을 청하지 않겠다고 나는 결심했었다.
하지만 돈을 마련할 길이 막막했다. 누구도 선뜻 많은 돈을 내주지 않았다. 유일하게 내가 매달릴 곳은 처갓집 말고는 없었다. 체면도 염치도 사치에 불과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처가에 사정 이야기를 했다. 장인장모님께서 수술비의 일부를 힘껏 마련해주셨다. 나머지는 얼마 전에 든 보험회사에서 대출하고; 그래도 부족한 것은 작은아이가 초등학교 때 저축한 돈까지 싹싹 긁어모았다.
큰아이가 큰 수술을 하게 되었지만 내가 앞이 보이지 않으니 아내는 서울에 갈 수 없었다. 나와 둘째만 남아 있는 건 그런대로 할 수 있었지만 이동문방구를 아침저녁으로 옮기고 장사를 하려면 아내가 옆에 있어야 했다. 한 푼이라도 벌어야 앞으로의 치료비에 조금이라도 보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는 4 남매 중 큰딸이고 처남만 밑으로 셋이었다. 남의 집 귀한 외동딸을 데리고 와서 잘 사는 것은 고사하고 나 자신이 장애인이 되어 고생만 시키니 송구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런데 아이 수술비까지 도움을 받자니 면목이 없어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더욱 열심히 살겠다는 다짐을 하며 다시 한 번 이를 악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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