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이 안정을 찾아갈 만할 때 아이들에게 사고가 생겼다. 문방구 앞에 집을 짓는 공사 현장이 있었는데 우리 아이들이 거기서 놀다가 이층에서 떨어진 것이다. 큰아이는 손목 부근에 금이 가고 작은아이는 머리를 다쳤다. 머리가 조금 깨진 둘째는 집에서 치료하면서 나았는데 큰아이가 계속 아파했다. 그 당시 신평에는 정형외과가 없어서 괴정병원으로 가서 검사를 했는데 뼈에 금이 갔다고 했다.
아이의 팔에 반 깁스를 해주면서 내일 다시 오라 했는데 아이들 뼈는 금방 잘 붙을 거라고 믿고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다. 사실 먹고 사는 게 바빠 병원 자주 가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반 깁스를 뺐다 끼웠다 하면서 지냈는데 얼마쯤 지나니 통증이 없어진 것 같았다. 그래서 다 완치된 줄 알았고 큰아이가 중학교 다닐 때까지도 몰랐다.
그런데 아이의 팔 모양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그때 깁스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뼈가 바로 붙지 못하고 삐딱하게 붙은 것이었다. 손목이 니은자처럼 꺾이게 자라고 있었다. 아이를 진단한 의사가 설명해주었다. 손목에 두 개의 뼈가 있는데 뼈 한쪽은 부러져 여러 조각이 나 있고 나머지 한쪽은 성장하면서 자꾸 위로 밀어 올리는 현상 때문에 이상한 모습이 된 거라고 했다.
한쪽 남은 뼈를 잘라버리고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수술을 하면 한쪽 팔이 훨씬 짧아지기 때문에 아이는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한다. 정말 기가 막혔다. 나 혼자 장애가 있으면 됐지 아이마저 장애로 인해 평생을 살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백방으로 알아본 결과 인하대학교에 가면 치료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아내도 나도 가게를 비울 수가 없어서 큰집 조카에게 부탁하여 인천으로 아이를 데리고 가게 했다. 검사 결과 인하대병원에서는 다시 서울대병원을 추천해주었다. 다행이었다. 하지만 우리 형편에 검사비와 경비는 물론 수술비와 입원비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렇다고 아이가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도록 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마련하기로 하고 수술을 받기로 했다. 나는 작은아들을 데리고 친구를 찾아갔다. 그는 세놓는 건물도 있었고 그의 형님이 호텔을 운영해서 나를 도와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때의 내 행색은 깡통만 들지 않았지 거지꼴이나 다름없었다. 겨울이었는데 옷차림도 초라하고 운동화를 신었는데 앞쪽이 벌어져 시침으로 꽂아서 신고 있었다. 수술비 마련에 신발을 사 신을 정신이 아니었다. 아무리 어려워도 친구들에게 돈 빌리는 일은 하지 않았는데 아이가 급하니 어쩔 수 없었다.
희망을 가지고 갔으나 헛일이었다. 친구네 건물에서 장사를 하는 분이 계셨는데 그 친구가 없다고 해서 얼굴도 못보고 그냥 돌아와야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친구는 집안에 있었는데 행색이 초라한 나를 보고 없다고 하라며 손을 저었다고 했다. 몹시 서운했다. 내가 인생을 잘못 살았구나 생각도 해보았으나 서운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친구가 어려우면 물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도 있는 것이고 형편이 정 안된다면 위로의 말 한 마디라도 해주는 것이 친구의 도리일 것이다. 그 뒤로 다시는 그 친구를 찾아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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