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작은아들이 다니는 대신중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어버이날 행사의 일환인 장한 어버이상 수상자로 나를 선정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좀 당황했다. 자식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오히려 시력장애를 가진 아버지 때문에 알게 모르게 상처를 받았을 아이를 생각하면 늘 미안하고 마음이 아팠다. 가장으로서, 아버지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도 다 못한 것 같은데 자식이 다니는 학교에서 장한 어버이 상까지 준다니 당혹스러운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솔직히 마음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했다.
좌절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온 걸 누군가 알아준다는 것이 용기도 되었고 앞으로 더 잘 해야겠다는 의욕도 충전되었다. 그런데 작은아이가 그 소식을 듣더니 학교에 오지 말라고 했다. 전교생이 다 보는 앞에서 시력장애를 가진 아버지를 내보이는 것이 어린 마음에 불편했던 모양이었다. 내심 서운하긴 했지만 그 마음도 이해가 되어서 아들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시상식 대신 안마사협회에 일찍 공부를 하러 가는 길은 조금 쓸쓸했다. 5월의 신록이 아름다울 계절이었다. 앞은 보이지 않았지만 피부에 닿는 온도와 부드러운 바람은 분명 초록의 세상을 느끼게 해주었다. 문득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스쳤다. 비록 어린 마음에 아이가 나를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해도 내가 언제까지나 아이의 숨겨진 아버지로 살 수는 없었다.
내가 시력장애를 겪어야 한다면 내 아들도 시력장애인의 아들인 걸 받아들일 수 있어야 했다. 나는 협회 선생님께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아들의 학교로 갔다. 아이의 학교 선생님들은 잘 왔다고 나를 반겨주었지만 아들은 보지 않아도 입이 부루퉁해있는 게 분명했다.
“안 온다고 했잖아.” 볼멘소리로 툴툴거렸다. 나는 아이에게 말했다.
“아빠가 비록 신체적인 장애가 있긴 하지만 마음의 장애는 없기 때문에 나는 부끄럽지 않다. 나는 누구의 앞이든 당당히 나설 수 있다. 너도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들은 그 당시 바로 수긍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좀 더 크면 이해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날 이후 나는 누구 앞에서라도 내 아이가 자랑스러워할 아버지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보다 더 떳떳하게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날 내가 받은 장한 어버이상은 나에게 더욱 당당히 살아가는 아버지가 되라는 격려의 상이었다. 그래서 나에게는 이 세상에서 무엇보다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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