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압원을 시작하고 보니 아버지를 찾아보는 것은 더욱 어려워졌다. 아무래도 혼자 계시는 것은 힘이 들 테니까 내게 모시겠다고 했지만 싫다고 하셨다. 죽을 때까지 살고 있는 그 집에서 계속 살겠다고 고집하셨다. 점점 쇠약해지는 아버지의 식사가 가장 큰 문제였다.
하는 수 없이 연락을 끊었던 형제들이 모여 회의를 했다. 남동생이 아버지를 모시기로 하고 나머지 형제들은 생활비를 보내주기로 결정을 보았다. 아버지 혼자 계시는 것보다는 안심이 되었지만 동생도 아침에 일 나가면 밤늦은 시간에 들어오곤 했으니 크게 달라질 것도 없었다. 그래도 아버지가 동생과 함께 있다는 생각에 조금은 마음이 놓였지만 마음 한곳에는 늘 자식으로서 아버지가 필요로 할 때, 정말 보살펴드려야 할 때 제대로 못한 것이 늘 마음에 남아 있었다.
어느덧 여름이었다. 안부를 물으려고 전화를 했는데 연락이 되지 않았다. 혹시 여동생네에 가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쪽으로도 전화를 했는데 역시 연락이 되지 않았다. 여동생과는 이름만 남매지 아버지에게 생활비를 보내주는 일을 상의할 때 말고는 서로 연락도 하지 않고 지내던 중이었다.
자꾸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다대포로 직접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 그런데 집에 아무도 없었다. 경비원에게 물었더니 아버지가 며칠 전에 외롭게 홀로 세상을 떠나셨다고 했다. 기가 막혔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형제들과 연락이 닿아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저희들끼리 장례를 치른 것이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것만도 원통한데 나에게 한마디 연락도 없던 형제들이 너무 야속하고 괘씸했다. 아무리 원수지간인 남이라도 그렇게는 못했을 것 같았다. 아무리 장남 구실을 못하고 살았다 해도 나도 자식이었다. 아버지의 임종도, 장례식도 보지 못한 나는 어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아무리 희망을 가지고 살아왔다고 해도 다 무슨 소용이 있는지 회의가 들었다. 그래도 아버지가 살아계신 것만으로도 힘이 되었는데; 장애를 가졌지만 좌절하는 모습만은 보여드리고 싶지 않았고 이제 좀 희망을 가지고 내 자리를 찾아가는 중이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다니. 그것도 장례도 치를 수 없었다니 누굴 원망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슬픔을 참고 다시 가장으로서 살아가야 했다. 또 다시 뛰어야 했다. 내 가족들이 지켜보고 있으니 살아야 했다. 아버님은 그런 나를 이해하시리라 믿었다. 장애를 극복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나를 저 위에서 내려다보며 대견하게 생각하고 계실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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