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안마수련원에서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날따라 박스가 많이 발에 걸렸다. 노점상을 하는 사람들이 인도에 박스들을 높이 쌓아놓은 것이었다. 지팡이를 휘두르며 방향을 자각하며 길을 가야 하는 시각장애우에게는 매우 위험한 장애물이었다.
동네사람들이고 내가 늘 다니는 길이어서 여러 번 양해를 구하고 부탁도 했으나 고쳐지지 않았다. 특히 내 진로를 방해하던 장애물을 가장 많이 내놓은 곳은 나와 경쟁 관계에 있는 학교 앞 과자 가게였다. 학교 바로 앞에서 과자를 판매하니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우리 가게로서는 그곳에게 어린 손님들을 뺏기는 꼴이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나로서는 그 집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
그날도 보행 중에 그 집 박스들에게 내 진로가 방해를 받았다. 눈을 감고 몇 초라도 걸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뭔가 발에 걸리거나 벽에 부딪히게 되면 알 수 없는 위험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긴다는 것을. 그런데 한두 번도 아니고 부탁을 한 것도 아닌데 매번 배려하지 않는 그들에게 급기야 화가 치밀었다.
“이게 뭐꼬?” 하면서 기어이 나는 발로 박스를 차서 넘어뜨려버렸다. 그러자 그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겉으로는 박스 때문이었지만 나로서는 필사적인 영역다툼이고 생존경쟁이었다. 지난 번 대머리아저씨를 할퀸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나는 지팡이를 짧게 접어서 그를 쳤다. 서로의 감정이 극에 달했다. 어디 오늘 너 죽고 나 죽자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뵈는 게 없는 사람이라 겁나는 것도 없었다. 그가 안 되겠는지 내 지팡이를 빼앗아 집어던져 버렸다. 지팡이는 내게 눈과 같은 것인데 비겁한 짓이었다. 내 눈을 빼앗아 던졌으니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죽자 살자 덤벼들자 그가 줄행랑을 쳤다.
나는 차도를 막고 서서 그놈을 찾으려고 했으나 잡을 수 없었다. 반대편에 공중전화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는 지팡이도 없이 차들을 막아 길을 건넜다. 그리고 전화로 경찰을 불렀다. 곧 경찰차가 왔고 나는 사실 그대로 이야기했다. 경찰은 알았으니 집에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놈을 잡기 전에는 갈 수 없다고 버텼고 결국 경찰이 그를 잡아왔다. 그는 경찰 앞에서 내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그래도 나는 화가 풀리지 않았다. 그가 내 지팡이를 형편없이 만들어 놓아서였다. 하지만 다음부터는 내가 안전하게 보행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다짐을 받는 것으로 일을 일단락 지었다.
경찰이 나를 집에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런 나에게 아내는 제발 싸움질 좀 하지 말고 다니라고 부탁했다. 싸운 뒤 경찰차를 타고 집에 온 것이 처음은 아니었으므로 아내에게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안전하게 보행을 할 수 있도록 시각장애우들과 내 권리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장애인들은 장애물이 있을 때 피해가면 되겠지만 우리는 보행에 위협을 받는 일이 허다하다.
인도에 주차되어 있는 자동차나 여러 가지 물건이 쌓여 있는 것들도 모두 우리에겐 위험한 장애물이다. 그런 것은 우리 같은 시각장애우뿐만 아니라 노약자와 어린이들을 위해서도 안전하게 걸을 수 있는 인도는 확보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몇 번의 사건 이후로 동네 사람들은 내가 나타나기만 하면 박스들 치우라고 야단들이었다. 시각장애우에 대한 이해와 배려라기보다는 성질 더러운 나를 피하기 위한 방편이었겠지만 나로서는 어쨌든 소기의 목표는 달성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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