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이 암이었다는 것을 아내는 끝까지 알지 못했다. 유독 장인이 아끼던 딸이었던 만큼 아내의 충격이 클까봐 장모님도 나도 알리지 않은 것이었다. 돌아가실 때까지 아버님이 완쾌될 거라고 믿었던 아내는 장인의 장례를 치르고 난 뒤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외동딸이다 보니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처남들보다는 많았던 장인이 폐암을 앓았다는 사실을 알고 아내는 더욱 가슴 아파했다. 아내는 장인이 돌아가시고 난 뒤 6개월이 넘도록 아버지를 부르며 보고 싶다며 밤마다 울곤 했다.
나는 장례식장에 가지 못했다. 장인과 장모님은 나를 인정해주셨지만 처가의 다른 가족들은 그러지 않았을 수도 있다. 몸이 불편한 나를 배려한 것이기도 했고, 많은 사람들이 문상을 오는 장례식장에서 시각장애인이 앉아 있는 것이 그들에게 불편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장모님께서도 안타까워하셨지만 장례식이 끝나고 집에 와서 영정 앞에 인사드리라고 나를 위로해주셨다.
사람들 앞에 내가 불편한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될 때의 자괴감을 극복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 나는 내가 왜 살아야 하나 하는 회의가 들었다. 앞을 못 보는 내가 간다 한들 도움이 될 건 없었을 것이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성가시게 할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그래도 자식 된 도리로서 빈소를 지킬 수 없다는 것과 가족들과 함께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없다는 것이 내게 더 큰 슬픔으로 다가왔다.
장인의 장례식엔 입대했던 작은아들이 특별휴가를 받아 나왔고, 큰아들의 회사 사람들도 많이 문상을 해주었다. 두 아들이 내가 채우지 못하는 몫까지 대신하고 있었다. 큰일을 겪어봐야 그 사람의 진가를 깨닫는다고 장인의 장례식을 치르는 기간 동안 아버님의 빈자리도 컸지만 장성한 두 아들의 대견함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3일장이 끝난 저녁에 처가에 갔다. 영정이 놓인 상 앞 술 한 잔 올리고 엎드려 절을 하며 나는 속으로 다시 한 번 울었다. 아버님은 나를 이해하고 용서하실 거라고 믿으면서도 그동안 잘해드리지 못한 것과 빈소를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은 가눌 길이 없었다. 아무 걱정 마시고 부디 하늘나라에서도 하고 싶은 일 다 하면서 즐거운 생활을 누리시기를 두 손 모아 기도드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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